댓글
기업이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방식
재단, 협력을 우선하다
JOHN BROTHERS
Summary.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기업의 관행을 따르기보다 지역사회가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생각만큼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말은 기업의 CSR 책임자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휴대전화나 햄버거를 고객에게 판매하듯, 사회문제의 복잡하고 다면적인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필란트로피의 출발점은 ‘타자화’에 있다. 지원기관이 ‘베풀고’, 지역사회는 ‘수혜한다’는 식의 프레임워크는 문제를 유발한다. 이러한 관점은 지역사회가 이미 효과적인 변화를 위한 해결책과 지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지역사회가 가진 지식과 맥락, 관계가 없다면, 지원기관들은 오늘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없다.
T. 로우 프라이스 재단T. Rowe Price Foundation은 지난 10년간 지역사회 단체들과의 협력 방식을 혁신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우리는 지역사회의 지혜가 우리의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9년여 동안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 원칙을 실천해 온 기업의 리더로서, 나는 그간 얻은 교훈과 함께 기업의 신뢰 기반 모금을 위해 개발한 실행 프레임워크를 공유하고자 한다.
도움이 상처가 될 때
겨울에 신을 따뜻한 신발 한 켤레를 얻기 위해 아버지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나에게 자원, 권력 그리고 소속감에 대해 큰 교훈을 남겼다.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에서 살던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지역 무료 급식소를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는 주민들에게 겨울용 신발을 나눠주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한 여성이 미소를 띠며 사람들의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젖은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자 아버지는 그 여성에게 빨간 티켓을 건네며 신발을 벗었다. 아버지를 따라 신발을 벗으려던 나를 멈춰 세우며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넌 괜찮아, 존. 나만 벗으면 돼." 양말에 난 구멍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봉사자가 아버지의 발을 씻기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우리 앞에 모여들었다.
그 여성 봉사자는 우리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아버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슬픔이 그 자리에 자식과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상황을 방관하는 세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주변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우리를 찍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표면적으로 지역사회에 선행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이 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발을 씻겨주던 봉사자는 자신이 돕는 사람보다 사진 찍는 일에 더 신경을 썼다. 그 봉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봉사자 자신과 그녀가 속한 단체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벗어나
그날 무료 급식소의 자원봉사자들처럼, 지원기관들도 비판보다는 칭찬을 받는 경우가 많다. 지역단체들은 지원기관이 제공하는 재정 지원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원기관에서 일하는 동료들 대부분은 나와 아버지처럼 도움을 받기 위해 줄을 서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러한 경험을 해봤다면, 신발을 받기 위해 발을 씻으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전략적 필란트로피 관행을 그대로 고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란트로피와 비영리단체 그리고 이들이 돕는 지역사회에서도 비슷한 관계의 역학이 존재한다. 내가 일하는 기업자선 부문에서도 그렇지만, 정말 많은 지원기관이 관계를 쌓는 데 집중하기보다 스스로를 일종의 홍보대사처럼 여기고 있다. 이들은 지역사회 파트너와 신뢰를 쌓고 돌보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임팩트를 만드는 과정을 착취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필란트로피 영역의 일부 접근 방식은 기업의 세계로부터 왔다. 사업으로 일군 부로 만들어진 가족재단, 기업재단, 금융기관을 통해 운영되는 기부자 조언 기금 등의 필란트로피 유형들은 모두 막대한 기업 자원을 활용한다. 전략적 필란트로피 역시 미리 설정된 지표, 하향식 전략, 규정 준수 문화, 결과 중심 평가 등을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기업의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반면,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비영리단체를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업계 통념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신뢰 기반 지원기관들은 비영리 파트너를 깊이 이해하고, 자신들만의 차별화된 자산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파트너와의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한다.
‘어떻게how’가 중요하다
나는 사회복지부터 지역사회 조직화에 이르는 다양한 현장에서 일했던 경험 속에서 한 가지 문제를 반복적으로 마주했다. 그것은 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할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급급하다는 것이었다. 사회복지 기관의 이용자든 재단의 수혜자든, 결국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체가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하는지가 아니라, 그 서비스를 ‘어떻게how’ 제공하느냐이다. ‘어떻게’가 잘 이뤄지면 활동의 가장 혁신적인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매우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필란트로피 분야에서 ‘어떻게’에 대한 접근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우리 가족이 무료 급식소에서 경험한 불편감과 신뢰의 부족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지원기관 중심의 시스템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많은 지역 주민과 비영리단체 직원들이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복잡한 지원 절차나 비현실적인 성과 데이터 요구, 지역사회를 불공정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방식의 권력행사는 지역사회와 지역사회 리더들이 필란트로피를 불신하는 이유이다. 지원기관으로서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역사회 구성원이 우리가 제공하는 필란트로피 지원의 ‘고객'임을 고려할 때, 지역사회 중심의 접근만이 오늘날 필란트로피 분야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015년, T. 로우 프라이스 재단은 프레디 그레이Freddie Gray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기존 방식how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당시 필란트로피 영역의 몇몇 기관은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 요소를 도입하고 있었지만, 기업 영역에는 이 개념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 재단은 지역사회의 자기결정권을 촉진하는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었고,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에 대해 학습을 하기 전이었다.
그레이가 사망하며 그로 인한 시민 소요 사태가 일어난 그 주, 나는 재단에서 일을 시작했다. T. 로우 프라이스 재단의 동료들은 나에게 지역 주민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물어왔다. 전직 지역사회 조직가로서 나는 웨스트 볼티모어West Baltimore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들이 가진 전문성과 경험이 우리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주민들은 기업에 답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후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교회와 초등학교를 방문하며 지역사회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희망과 꿈, 실망과 우려에 귀를 기울였다. 주민들은 열악한 주거 환경이나 일자리 부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병원의 긴 대기줄이나 사회복지 서비스를 신청하며 겪는 직원의 불친절한 대우처럼 일상적으로 갖는 공공과 민간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더 많이 토로했다. 지역 비영리단체의 대표들도 재정 지원 부족에 대해 호소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복잡한 필란트로피 시스템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일의 어려움을 더 많이 언급했다. 필란트로피가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how 이해하기 어렵고, 배타적이며, 접근하기 힘든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기금 신청 절차가 얼마나how 과도한지, 데이터 요구는 얼마나how 부담스러운지 그리고 필란트로피 분야의 관점이 지역사회의 경험과 얼마나how 동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불만이 이어졌다.
필란트로피의 새로운 방식
일부 재단은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를 표방하면서도 여전히 수혜자에게 부담을 주는 평가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등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행을 지속하고 있다.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기존의 위계적 권력관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실천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 기반의 접근을 추구하려는 기업 후원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지원기관은 반드시 권력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지원기관은 자신들의 일이 권력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불편해하며, 이를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없이는 지역사회와 협력하는 우리의 활동과 미션이 흔들릴 수 있다.
지역사회와 진정성 있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민하는 2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들이 신뢰 기반 접근 방식을 배우기 위해 T. 로우 프라이스 재단을 찾았다.
특히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살해된 이후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를 계기로, 20여 개의 미니애폴리스 소재 기업들이 볼티모어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우리 재단의 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이 사건이 단순히 조지 플로이드 개인의 죽음에 국한되지 않으며,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구조적인 인종차별이 존재했고, 기업이 그러한 차별적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지원기관으로서 우리는 과거의 실수는 물론, 지역사회를 괴롭히는 불평등을 초래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솔직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지역사회와 신뢰를 쌓기 위해 정직과 책임감은 필수이다.
기금 배분 방식에는 지역사회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역사회 파트너와 직접 소통하면서, 많은 지역단체들에 조직 건강성 강화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우리는 800개 이상의 비영리단체와 7,000명 이상의 비영리 리더를 대상으로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이뤄진 위원회가 이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효과적인 지원 방식에 대한 의견을 제공한다.
우리는 지역사회에 더 나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 몇 가지 변화를 시도했다. 먼저 외부 지원서 양식을 개선해 부담스러운 요구 사항을 줄이고, 언어를 더욱 신중하게 선택했다. 또한 단체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컨시어지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2017년부터는 다년간의 일반 운영 지원을 제공하면서 번거로운 관리 프로세스를 없앴다.
모든 자원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신뢰 기반 접근 방식을 실천하려면, 지속적인 자기성찰을 통해 권력의 역학관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면밀히 살피고 지역사회의 요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의 지원은 보조금의 차원을 넘어 그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볼티모어는 서비스 제공 시스템이나 공공 자금 지원체계와 같은 인프라가 낙후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면 많은 기업들은 잘 정비되고 효율적인 운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격차를 발견하면서 기금 지원 외에 지역사회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원을 신뢰 기반 지역사회 투자trust-based community investment로 명명하며, 기업으로서 우리의 모델이 단순한 기금 배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회사의 비재무적 자산을 활용해 지역사회의 성장을 돕는 일에도 집중해왔다. 일례로, 볼티모어의 중소기업과 기업가를 지원하는 여러 중간지원조직이 입주할 수 있는 전용공간, 비모어 코랩Bmore CoLab을 본사에 마련했다. 또한 지역사회 파트너와 기업 커뮤니티가 긴밀히 협력하는 데도 힘썼다. 시민 혁신가를 양성하기 위해 20개 이상의 기업을 모았고, 기업들이 참여하는 컨설팅팀을 구성해 지역 컨설팅 서비스를 강화했다. 이러한 실험과 노력은 기존 필란트로피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며, 도시와 지역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변화를 위한 의지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와 권력 이전 접근법Power-shifting approaches이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 기업 기부자를 포함한 지원기관들은 과연 기존의 관행에서 기꺼이, 때로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멀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게 된다. 우리가 지원하는 지역사회는 스스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 후원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강점인 자원 동원력을 지역사회의 회복력과 결합시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신뢰 기반의 접근 방식은 매우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how 접근하고, 실천하느냐가 사람들에게 오랜 인상과 때로는 불행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웨스트 볼티모어 주민들로부터 ‘어떻게how’의 중요성을 배웠고,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무료 급식소에 앉아 있으면서 그 중요성을 직접 경험했다. 역사가 보여주듯 가장 성공적인 사회운동은 지역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활약하는 훌륭한 인물이나 단체를 신뢰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돌봄과 자기결정권에 뿌리를 둔 필란트로피 생태계로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1 . 프레디 그레이 사건은 2015년 볼티모어에서 체포된 흑인 남성이 경찰의 부적절한 구금 절차로 치명적인 척추 손상을 입고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 내 경찰 폭력과 인종 차별 문제를 조명하며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강화하고, 경찰 개혁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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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BROTHERS
존 브라더스는 T. 로우 프라이스 재단과 T. 로우 프라이스 채리터블의 대표를 맡고 있다. 또한 다국적 컨설팅 회사인 퀴두(Quidoo)의 설립자로 10년 넘게 회사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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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란트로피
기업이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방식
재단, 협력을 우선하다
JOHN BROTHERS
Summary.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기업의 관행을 따르기보다 지역사회가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생각만큼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말은 기업의 CSR 책임자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휴대전화나 햄버거를 고객에게 판매하듯, 사회문제의 복잡하고 다면적인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거나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필란트로피의 출발점은 ‘타자화’에 있다. 지원기관이 ‘베풀고’, 지역사회는 ‘수혜한다’는 식의 프레임워크는 문제를 유발한다. 이러한 관점은 지역사회가 이미 효과적인 변화를 위한 해결책과 지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지역사회가 가진 지식과 맥락, 관계가 없다면, 지원기관들은 오늘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없다.
T. 로우 프라이스 재단T. Rowe Price Foundation은 지난 10년간 지역사회 단체들과의 협력 방식을 혁신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우리는 지역사회의 지혜가 우리의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9년여 동안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 원칙을 실천해 온 기업의 리더로서, 나는 그간 얻은 교훈과 함께 기업의 신뢰 기반 모금을 위해 개발한 실행 프레임워크를 공유하고자 한다.
도움이 상처가 될 때
겨울에 신을 따뜻한 신발 한 켤레를 얻기 위해 아버지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나에게 자원, 권력 그리고 소속감에 대해 큰 교훈을 남겼다.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에서 살던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지역 무료 급식소를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는 주민들에게 겨울용 신발을 나눠주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한 여성이 미소를 띠며 사람들의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젖은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자 아버지는 그 여성에게 빨간 티켓을 건네며 신발을 벗었다. 아버지를 따라 신발을 벗으려던 나를 멈춰 세우며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넌 괜찮아, 존. 나만 벗으면 돼." 양말에 난 구멍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봉사자가 아버지의 발을 씻기는 동안 몇몇 사람들이 우리 앞에 모여들었다.
그 여성 봉사자는 우리에게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아버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아버지의 슬픔이 그 자리에 자식과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상황을 방관하는 세상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 주변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우리를 찍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표면적으로 지역사회에 선행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이 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발을 씻겨주던 봉사자는 자신이 돕는 사람보다 사진 찍는 일에 더 신경을 썼다. 그 봉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봉사자 자신과 그녀가 속한 단체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벗어나
그날 무료 급식소의 자원봉사자들처럼, 지원기관들도 비판보다는 칭찬을 받는 경우가 많다. 지역단체들은 지원기관이 제공하는 재정 지원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지원기관에서 일하는 동료들 대부분은 나와 아버지처럼 도움을 받기 위해 줄을 서본 경험이 없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러한 경험을 해봤다면, 신발을 받기 위해 발을 씻으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전략적 필란트로피 관행을 그대로 고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란트로피와 비영리단체 그리고 이들이 돕는 지역사회에서도 비슷한 관계의 역학이 존재한다. 내가 일하는 기업자선 부문에서도 그렇지만, 정말 많은 지원기관이 관계를 쌓는 데 집중하기보다 스스로를 일종의 홍보대사처럼 여기고 있다. 이들은 지역사회 파트너와 신뢰를 쌓고 돌보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임팩트를 만드는 과정을 착취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필란트로피 영역의 일부 접근 방식은 기업의 세계로부터 왔다. 사업으로 일군 부로 만들어진 가족재단, 기업재단, 금융기관을 통해 운영되는 기부자 조언 기금 등의 필란트로피 유형들은 모두 막대한 기업 자원을 활용한다. 전략적 필란트로피 역시 미리 설정된 지표, 하향식 전략, 규정 준수 문화, 결과 중심 평가 등을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기업의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반면,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비영리단체를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업계 통념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신뢰 기반 지원기관들은 비영리 파트너를 깊이 이해하고, 자신들만의 차별화된 자산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파트너와의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주력한다.
‘어떻게how’가 중요하다
나는 사회복지부터 지역사회 조직화에 이르는 다양한 현장에서 일했던 경험 속에서 한 가지 문제를 반복적으로 마주했다. 그것은 서비스를 어떻게 제공할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급급하다는 것이었다. 사회복지 기관의 이용자든 재단의 수혜자든, 결국 서비스를 받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체가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하는지가 아니라, 그 서비스를 ‘어떻게how’ 제공하느냐이다. ‘어떻게’가 잘 이뤄지면 활동의 가장 혁신적인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매우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필란트로피 분야에서 ‘어떻게’에 대한 접근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우리 가족이 무료 급식소에서 경험한 불편감과 신뢰의 부족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지원기관 중심의 시스템에서 지원을 요청하는 많은 지역 주민과 비영리단체 직원들이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복잡한 지원 절차나 비현실적인 성과 데이터 요구, 지역사회를 불공정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방식의 권력행사는 지역사회와 지역사회 리더들이 필란트로피를 불신하는 이유이다. 지원기관으로서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역사회 구성원이 우리가 제공하는 필란트로피 지원의 ‘고객'임을 고려할 때, 지역사회 중심의 접근만이 오늘날 필란트로피 분야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015년, T. 로우 프라이스 재단은 프레디 그레이Freddie Gray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기존 방식how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당시 필란트로피 영역의 몇몇 기관은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 요소를 도입하고 있었지만, 기업 영역에는 이 개념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리 재단은 지역사회의 자기결정권을 촉진하는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었고,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에 대해 학습을 하기 전이었다.
그레이가 사망하며 그로 인한 시민 소요 사태가 일어난 그 주, 나는 재단에서 일을 시작했다. T. 로우 프라이스 재단의 동료들은 나에게 지역 주민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물어왔다. 전직 지역사회 조직가로서 나는 웨스트 볼티모어West Baltimore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들이 가진 전문성과 경험이 우리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주민들은 기업에 답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후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교회와 초등학교를 방문하며 지역사회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희망과 꿈, 실망과 우려에 귀를 기울였다. 주민들은 열악한 주거 환경이나 일자리 부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병원의 긴 대기줄이나 사회복지 서비스를 신청하며 겪는 직원의 불친절한 대우처럼 일상적으로 갖는 공공과 민간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더 많이 토로했다. 지역 비영리단체의 대표들도 재정 지원 부족에 대해 호소하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복잡한 필란트로피 시스템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일의 어려움을 더 많이 언급했다. 필란트로피가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how 이해하기 어렵고, 배타적이며, 접근하기 힘든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기금 신청 절차가 얼마나how 과도한지, 데이터 요구는 얼마나how 부담스러운지 그리고 필란트로피 분야의 관점이 지역사회의 경험과 얼마나how 동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불만이 이어졌다.
필란트로피의 새로운 방식
일부 재단은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를 표방하면서도 여전히 수혜자에게 부담을 주는 평가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등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행을 지속하고 있다.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는 기존의 위계적 권력관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실천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 기반의 접근을 추구하려는 기업 후원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지원기관은 반드시 권력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지원기관은 자신들의 일이 권력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불편해하며, 이를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없이는 지역사회와 협력하는 우리의 활동과 미션이 흔들릴 수 있다.
지역사회와 진정성 있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민하는 2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들이 신뢰 기반 접근 방식을 배우기 위해 T. 로우 프라이스 재단을 찾았다.
특히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살해된 이후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를 계기로, 20여 개의 미니애폴리스 소재 기업들이 볼티모어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우리 재단의 방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이 사건이 단순히 조지 플로이드 개인의 죽음에 국한되지 않으며,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구조적인 인종차별이 존재했고, 기업이 그러한 차별적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지원기관으로서 우리는 과거의 실수는 물론, 지역사회를 괴롭히는 불평등을 초래한 우리의 역할에 대해 솔직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지역사회와 신뢰를 쌓기 위해 정직과 책임감은 필수이다.
기금 배분 방식에는 지역사회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역사회 파트너와 직접 소통하면서, 많은 지역단체들에 조직 건강성 강화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우리는 800개 이상의 비영리단체와 7,000명 이상의 비영리 리더를 대상으로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이뤄진 위원회가 이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효과적인 지원 방식에 대한 의견을 제공한다.
우리는 지역사회에 더 나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 몇 가지 변화를 시도했다. 먼저 외부 지원서 양식을 개선해 부담스러운 요구 사항을 줄이고, 언어를 더욱 신중하게 선택했다. 또한 단체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컨시어지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2017년부터는 다년간의 일반 운영 지원을 제공하면서 번거로운 관리 프로세스를 없앴다.
모든 자원을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신뢰 기반 접근 방식을 실천하려면, 지속적인 자기성찰을 통해 권력의 역학관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면밀히 살피고 지역사회의 요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의 지원은 보조금의 차원을 넘어 그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볼티모어는 서비스 제공 시스템이나 공공 자금 지원체계와 같은 인프라가 낙후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면 많은 기업들은 잘 정비되고 효율적인 운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격차를 발견하면서 기금 지원 외에 지역사회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원을 신뢰 기반 지역사회 투자trust-based community investment로 명명하며, 기업으로서 우리의 모델이 단순한 기금 배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회사의 비재무적 자산을 활용해 지역사회의 성장을 돕는 일에도 집중해왔다. 일례로, 볼티모어의 중소기업과 기업가를 지원하는 여러 중간지원조직이 입주할 수 있는 전용공간, 비모어 코랩Bmore CoLab을 본사에 마련했다. 또한 지역사회 파트너와 기업 커뮤니티가 긴밀히 협력하는 데도 힘썼다. 시민 혁신가를 양성하기 위해 20개 이상의 기업을 모았고, 기업들이 참여하는 컨설팅팀을 구성해 지역 컨설팅 서비스를 강화했다. 이러한 실험과 노력은 기존 필란트로피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며, 도시와 지역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변화를 위한 의지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와 권력 이전 접근법Power-shifting approaches이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 기업 기부자를 포함한 지원기관들은 과연 기존의 관행에서 기꺼이, 때로는 급진적인 방식으로 멀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게 된다. 우리가 지원하는 지역사회는 스스로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 후원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강점인 자원 동원력을 지역사회의 회복력과 결합시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신뢰 기반의 접근 방식은 매우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how 접근하고, 실천하느냐가 사람들에게 오랜 인상과 때로는 불행하고 안타까운 감정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웨스트 볼티모어 주민들로부터 ‘어떻게how’의 중요성을 배웠고,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무료 급식소에 앉아 있으면서 그 중요성을 직접 경험했다. 역사가 보여주듯 가장 성공적인 사회운동은 지역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활약하는 훌륭한 인물이나 단체를 신뢰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돌봄과 자기결정권에 뿌리를 둔 필란트로피 생태계로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1 . 프레디 그레이 사건은 2015년 볼티모어에서 체포된 흑인 남성이 경찰의 부적절한 구금 절차로 치명적인 척추 손상을 입고 사망한 사건으로, 미국 내 경찰 폭력과 인종 차별 문제를 조명하며 전국적인 시위를 촉발했다. 이 사건은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강화하고, 경찰 개혁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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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BROTHERS
존 브라더스는 T. 로우 프라이스 재단과 T. 로우 프라이스 채리터블의 대표를 맡고 있다. 또한 다국적 컨설팅 회사인 퀴두(Quidoo)의 설립자로 10년 넘게 회사를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