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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팩트 커리어의
진화와 분화
2025-3
김경하 & 김규리
Summary. 임팩트 커리어는 '좋은 일'을 너머 사회환경의 변화와 생태계의 성장 과정 가운데 진화하고 분화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경제 성장'은 한때 거의 종교에 가까운 신념이었다. 절대적 가난과 결핍의 시기를 벗어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압축 성장을 이뤘고, 성장 그 자체가 윤리로 작동했다. 성공은 '선'이었고, 효율은 '정의'였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그 신념의 붕괴를 상징했다. 한 세대가 쌓아올린 성장의 성채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개인은 국가의 이름으로 구조조정됐다.
경제 호황기 베이비붐 세대의 커리어는 '서류만 내면 합격하던 시절'을 상징했다. 일자리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음 세대에게 일은 생존의 전장이었다. 성장률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자 청년들의 장래희망 1위는 공무원과 교사가 됐다. '안정'은 곧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관점을 낳는다. 저성장, 경기침체, 금융위기의 여파 속에서 일부 청년들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안정보다 의미를, 생존보다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 흐름에 불을 붙였다. 월스트리트의 탐욕이 초래한 이 사건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남겼다. 미국에서는 이를 계기로 '사회적 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윤을 내되,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은 낡은 자본주의를 향한 반성과 새로운 생태계에 대한 제안이었다.
한국에서도 이 흐름은 빠르게 수용됐다. 외환위기의 상처와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교차하던 시점이었다. 청년 세대는 이제 '좋은 일'이 경제의 언어로 작동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회를 바꾸는 일을 '지속가능한 일'로 만들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없을까?"
2000년대 중반, 이런 질문은 낯설고도 용감한 상상력이었다. 사회문제는 비판의 대상이었지, 직업의 언어로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물음에서 한국의 임팩트 커리어는 태동했다. 2006년,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넥스터스Nexters'라는 이름의 한국 최초 사회적기업가 연구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당시 한국은 사회적기업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책상 앞에서 논문을 쓰는 대신 직접 현장을 향했다. 함께일하는재단(당시 실업극복국민재단)의 '2007 세계 희망경제 탐방 프로젝트'를 통해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사회적기업을 찾아 나섰다. 빈농에게 관개 장비를 공급하는 IDEI, 마이크로크레디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라민은행을 직접 방문하며, 사회적 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의 원형을 눈으로 확인했다. 귀국 후에는 그 경험을 <아름다운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문제를 비판하는 대신 디자인하라."
그들이 배운 태도는 이후 한국 사회혁신 생태계의 근간이 됐다. 당시 멤버들은 프로젝트 기획서를 쓰고, 아이디어를 검증하며, 밤을 새워 토론했다고 회상한다.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닌 '실행'에 초점을 맞춘 동아리였다. 멤버 중 상당수가 한국을 대표하는 소셜벤처 창업자가 됐다.
'사람과 이야기'가 만든 내러티브의 힘
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움직인 것이 '사람' 그리고 '스토리'였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바꾼 대안기업가 80인', '보노보 혁명' 등 세계 사회혁신가를 인터뷰한 책은 당시 청년들에게 '임팩트 커리어 입문서'였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기업가가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은, 막연한 이상을 '할 수 있는 일'로 바꾸어 주었다.
스콜 재단이 강조하듯 사회변화의 핵심에는 언제나 '내러티브의 전환'이 있다. 낡은 규범을 해체하고, 대안적 서사가 설 자리를 만드는 일. 그것이 곧 변혁의 첫걸음이다. 한국의 청년 세대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문제를 비판하는 대신 자신만의 언어로 사회문제를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주요 매체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서사가 확산됐다. 2010년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가 창간 특집으로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시리즈를 보도한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잡 팩토리의 로버트 로스, 아쇼카의 빌 드레이튼, KIVA의 맷 플래너리 등 글로벌 사회혁신가들의 이야기는 한국 청년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다. "세상을 바꾸는 일도 지속가능할 수 있다." 이제 '좋은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직업'은 공상이 아닌 하나의 커리어가 되기 시작했다.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시리즈를 보도한 더나은미래 제1호 (사진 출처: 더나은미래)
국가가 공익을 제도 속으로 끌어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기업은 대체로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태어났다. 복지의 공백을 시민이 메우며, 공동체가 시장의 언어를 빌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국은 시민의 운동이 아니라 '국가의 정책'으로 사회적기업을 제도화했다.
당시 정부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업률은 급등했고, 여성의 사회참여와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돌봄·보육·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시장은 이런 사회서비스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정부는 긴급 처방으로 '공공근로'와 '자활근로' 사업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일자리는 일시적이었고 서비스 품질도 낮았다. 결국 '지속가능한 일자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커졌고, 2007년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제정됐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사회적기업 육성법을 만든 나라였다.
이 법은 사회적기업을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며, 영업활동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기업'으로 정의했다. 그만큼 정부 인증 사회적기업 다수는 '취약계층 일자리형'이었고, '사회적 가치'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법은 공익을 복지의 영역에서 '시장과 고용의 언어'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행정이 공익을 제도화하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공적 의무'뿐만 아니라 '경제적 행위'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청년에게 '실험의 무대'를 열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청년 등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은 단순한 일자리 정책이 아니라, 청년들이 스스로 사회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식을 실험할 수 있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었다. 예비 창업팀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1년간 자금·공간·멘토링·네트워크를 지원받았다. 4년간 1,363개의 창업팀이 이 사업을 거쳐 나왔다. 정부가 무대를 만들고, 청년이 그 무대 위에서 '새로운 경제'를 실험했다.
뒤이어 대기업과 재단이 '공모전'이라는 두 번째 무대를 열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청년들을 경쟁을 통해 성장의 장으로 이끈 것이다. SK, 현대차, LG 등 기업이 청년 세대의 실험을 사회적 무대로 끌어올리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점차 하나의 커리어로서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성수동, 사회혁신이 커리어가 된 거리
정부와 민간의 지원이 자본으로 전환되면서, 한국의 사회혁신 생태계는 '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보조금의 논리가 지속가능성의 논리로 바뀌자, 사회혁신은 복지의 외곽이 아닌 경제의 한 축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2011년 정부가 조성한 사회적기업 전용 모태펀드는 단순한 보조금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 자본이었다. 이후 규모가 확대되며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처에도 본격적으로 투자금이 흘러들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러 컨설팅 조직들이 임팩트 투자사로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했고, 성수동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조직들이 함께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2014년, 루트임팩트는 사회혁신가를 위한 공동주거 공간을 조성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듯, 한 창업가를 키우려면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이 철학은 공간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3년 뒤, 성수동 한복판에 지상 8층 규모의 코워킹 스페이스가 문을 열며 사회혁신가들의 '일과 삶이 만나는 실험장'이 탄생했다. 개관 초기부터 40여 개 팀이 입주했고, 성수동 일대는 빠르게 사회혁신의 거점으로 변모했다.

사회혁신가를 위한 코워킹 스페이스 '헤이그라운드' 개소 1주년을 맞아 루트임팩트 구성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루트임팩트)
이제 성수동 일대는 '소셜벤처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발달장애인을 고용해 비누를 만드는 '동구밭', 개발도상국 아동을 위한 교육용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스타트업 '에누마' 등 국내 대표 사회적 기업과 소셜벤처 1세대 중 상당수가 이곳을 거쳐갔다. 산업화 시대의 공장이 사라진 자리에, '사회적 가치'라는 새로운 산업이 들어선 셈이다. 2014년만 해도 사회적 목적을 지닌 조직은 10개 남짓이었지만, 2022년에는 500여 개로 늘었다.
행정 역시 이 변화를 하나의 '생태계 단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이곳 헤이그라운드에서 '소셜벤처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이후 정부들도 사회적경제 정책의 현장으로 성수동을 찾았다. 사람과 기업, 자원이 모이자, 정부 역시 그것을 생태계로 받아들였다.
커리어의 실험장: 현장에서 배우는 프로그램의 등장
기업과 조직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일자리의 확장을 의미했다. 성수동의 밀집된 거리감은 '커리어의 해상도'를 높여줬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자원봉사를 넘어 '지속가능한 일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덕분에 비록 조직의 규모는 작더라도 '조직 밖 동료'가 존재한다는 감각이 공유됐다.
2015년, 루트임팩트는 청년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 '임팩트 베이스캠프IBC'를 운영했다. IBC는 청년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을 기르고 이를 커리어와 연결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8~16주간 사회문제를 정의하고 직접 해결책을 도출하는 프로젝트 기반 학습Project-Based Learning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금까지 500명에 가까운 수료생이 배출됐고, 다양한 사회혁신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참가자들은 공통적으로 '임팩트를 업業으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감했다고 회상했다. 프로그램을 마친 이들은 현장에 합류해 선배들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보며, '좋은 의도가 일로 연결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배워갔다. 이 경험은 사회문제 해결이 이상이 아니라 직업의 언어로 실천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수료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변화를 계속 만들었다. 누군가는 비영리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또 다른 이는 청년의 강점을 기반으로 진로를 설계하는 소셜벤처를 세웠다. 지역 정치나 기후 운동 등 다른 영역으로 확장한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 프로그램을 거친 청년들의 경로는 임팩트 커리어가 개인의 열정에 머무르지 않고, 생태계의 구조 속에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 임팩트 커리어 생태계의 또 다른 축
이 무렵, 바로 성수동 인근의 한양대학교에서도 같은 흐름이 자라나고 있었다. 2018년 한양대는 국내 최초로 아쇼카UAshoka U에 지정되며, 대학이 사회혁신을 제도 교육 안으로 끌어들였다. 캠퍼스에서는 사회혁신 교과목과 비교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학생들은 사회문제를 학문이 아니라 현장과 '일의 언어'로 배우기 시작했다. 현장형 프로젝트, 지역 연계 수업 등이 이어지면서 대학은 임팩트 생태계의 또 다른 축이 되었다.

한양대생들이 창업한 소셜벤처 '카이나'가 필리핀 현지조사를 떠난 현장.
'카이나'는 한식 프랜차이즈로 현지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다. (사진 출처: 한양대 사회혁신센터)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거대한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통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수동의 창업가들에게도 그 이야기가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 믿음이 사람을 모으고, 공간을 연결하고, 자원을 끌어왔다.
그렇게 한국의 임팩트 생태계는 사람에서 시작해 공간으로 그리고 커리어로 확장됐다. 성수동의 풍경은 단순한 산업의 변화가 아니라, 일의 가치가 바뀌는 현장이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첫 직장을, 누군가는 두 번째 도전을, 또 누군가는 인생의 전환점을 찾았다.
ESG의 부상과 임팩트 커리어의 변곡점
임팩트 커리어의 또 하나의 변곡점은 ESG의 부상과 함께 찾아왔다. 2020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래리 핑크 회장은 CEO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환경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업의 기후 리스크 대응과 사회적 책임을 핵심 투자 판단 기준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 한 문장은 세계 자본시장의 언어를 바꿔놓았다. 이후 ESG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고, 글로벌 투자 흐름이 ESG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더불어 2019년 미국의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usiness Roundtable'은 181명의 글로벌 대기업 CEO들이 모여 '기업의 목적purpose' 선언문을 발표했다. 주주 이익 극대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객·직원·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방향을 공식화한 것이다.
제도화된 ESG, 기업의 언어로 들어오다
이 흐름은 한국 기업에도 빠르게 번졌다. 대기업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필수적으로 발간했고, ESG 위원회가 이사회 한켠을 차지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부 기업만이 자율적으로 CSR 보고서를 내던 시절이었지만, 2023년 기준 국내 매출 상위 30대 기업은 모두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했다. 기업은 기후위기를 '좌초자산'의 문제로, 공급망 인권 리스크를 '경영 리스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책임이 곧 기업의 생존 조건이 된 것이다. 이처럼 ESG가 기업의 언어가 되자, 사회문제를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 언어'가 필요해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법률과 컨설팅 분야였다. 2021년, 김앤장, 율촌, 광장, 태평양 등 국내 4대 로펌이 일제히 ESG 전담 조직을 출범시켰다. 환경·노동·공정거래·컴플라이언스 전문가 수십 명이 투입됐고, 웨비나에는 수백 명이 넘는 기업 관계자들이 몰렸다. 과거 사회공헌 담당 부서가 기업의 '선의'를 대변했다면, 이제 ESG 대응팀은 '리스크 관리의 최전선'이 되었다. 기업은 법률 자문과 규제 해석, 공시 가이드라인을 통해 ESG를 '감성의 언어'가 아닌 '컴플라이언스의 언어'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대로부터 솟아오른 변화의 압력
그러나 ESG의 확산은 제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변화의 불씨는 세대가 지폈다. 2019년, 스웨덴의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기후파업'은 전 세계 청소년들의 언어가 됐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운동은 한국에서도 '청소년 기후행동'으로 번졌고, 청소년들은 헌법소원까지 제기하며 '기후위기는 생존의 문제'라고 외쳤다.

2022년, 청소년기후행동이 서울 종로구에서 진행한 '기후파업' (사진 출처: 청소년기후행동)
젊은 세대의 감수성은 곧 소비 행동으로 옮겨갔다. 남양유업은 대리점 갑질과 폐쇄적인 사내문화로 '불매 1순위 기업'이 되었고, 결국 오너 경영 체제가 무너졌다. SPC그룹 역시 잇따른 공장 사망사고와 불법 파견 논란으로 ESG 리스크가 폭발했다. 온라인에서 확산된 불매운동은 매출로 그리고 주가로 이어졌다. 소비자는 더 이상 정보의 수용자가 아니라, 기업의 윤리를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가치 행동자'가 된 것이다.
이 세대는 인권 감수성을 체화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체벌이 금지되고, 괴롭힘은 신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배우며 자랐다. 부당한 대우는 '참는 것'이 아니라 '시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러나 막상 사회에 나와 맞닥뜨린 현실은 달랐다. 업무를 빙자한 괴롭힘, 침묵을 강요하는 조직문화, 안전보다 속도를 앞세우는 현장이 여전했다. 인권이 기본이 된 세대에게 이런 풍경은 낡은 폭력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조직보다 개인이 먼저다."
ESG를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세대는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많은 기업은 여전히 그들의 인식을 따라가지 못한다. 기성세대가 ESG를 '규제와 평판의 언어'로 해석할 때, MZ세대는 그것을 '존중과 인권의 언어'로 이해한다. ESG의 압력은 시장뿐만 아니라 조직 안의 젊은 구성원들로부터도 오고 있다.
임팩트 커리어, 전문직의 언어를 얻다
이처럼 주류가 ESG를 중심으로 제도화의 언어로 움직이는 동안, 성수동을 중심으로 한 임팩트 생태계는 '의미의 언어'로 진화했다. ESG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답했다면, 이들은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임팩트는 이제 정량적 평가의 대상이자 전략의 중심이 됐다. 한쪽은 시장을 정비했고, 다른 한쪽은 가치를 정교화했다. 주류의 제도화와 주변부의 실험이 동시에 진화하면서, 임팩트 커리어는 비로소 전문직의 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누가 이 복잡한 변화를 설계하고 관리할 것인가'였다. ESG와 임팩트 투자의 확산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전문 인력을 필요로 했다. 임팩트 측정과 관리IMM, 기후 리스크 분석, 이해관계자 커뮤니케이션 등은 사회문제를 직관이 아닌 데이터와 논리로 다루는 시대를 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임팩트 전문직Impact Professionals'이다.
임팩트리서치랩, 트리플라잇 등 2019년 이후 등장한 여러 연구기관들은 사회적 변화를 수치로 번역하고, 기업의 행동을 정량화하기 시작했다. 사회적기업가가 변화를 '만들었다면', 임팩트 전문가는 그 변화를 '측정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임팩트'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지만, 이제는 기업이 먼저 '우리의 임팩트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는 임팩트 커리어가 감성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신념의 실천에서 전문성의 체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와 생존이 만나는 '일의 윤리'를 묻다
임팩트 커리어는 직업의 변천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일의 의미'를 학습해 온 과정이다. 2000년대의 태동은 '좋은 일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이었고, 2010년대의 집적은 '함께 일하면 바꿀 수 있다'는 구조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2020년대의 전환은 '존중받으며 일한다'는 윤리의 시대다. 성장의 시대가 효율의 윤리를 낳았다면, 전환의 시대는 공감과 존엄의 윤리를 요구한다. 임팩트 커리어는 특별한 직업이 아니라, 저성장 시대의 생존 방식이자 일의 새로운 윤리다.
이제 Z세대가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임팩트 커리어는 더 이상 주변부의 대안이 아니다. 딜로이트의 '2024 글로벌 밀레니얼·Z세대 서베이'에 따르면, Z세대의 89%, 밀레니얼의 92%가 "직업의 목적 의식이 자신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답했다. 그들은 급여보다 '의미'를, 직함보다 '영향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 세대가 추구하는 '의미'는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려는 '이중의 실천가'다. 기부나 자선으로 대표되던 과거의 공익 활동이 이제는 '임팩트 투자', '소셜 비즈니스', '비영리 스타트업'이라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로 재편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과 가치를 기반으로 지속가능하게 일하는 방식이 같은 문장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다
이 변화의 뿌리는 위기 경험에 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통과한 세대는 불안정과 불평등의 시대를 마주했다. 안정된 일자리만으로는 삶의 균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일의 목적을 '생존'에서 '기여'로 옮겼다. 그 결과, 노동시장은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를 묻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기업 역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조직의 목적이 모호하면 인재를 잃는 시대, 인재 확보의 경쟁력은 이제 '임팩트 서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하느냐에 달려 있다.
ESG와 임팩트 투자는 이런 전환을 제도화했다. 과거 기업에서 '사회적 가치'는 기부나 홍보의 영역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경영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자선이 아니라 비즈니스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직무와 산업이 생겨났다.
기업 안에는 ESG 전담조직과 임팩트 직무가 만들어지고, 재무 성과와 사회 성과를 함께 설계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기업이 사회문제의 해결자로서 책임을 다할 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커리어 역시 임팩트 커리어가 된다. 이제 '임팩트 커리어'란 조직의 성격이 아닌 일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변화하고 있다.
임팩트 커리어의 부상은 하나의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일의 의미에 대한 세대적 학습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 새로운 노동 윤리는, 한국 사회가 성장의 언어에서 공존의 언어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치 있는 일'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다. 지금, 그 변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선善'을 설계하고 있다. 결국 그들의 일은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그 질문에 끝까지 답하려는 사람들, 그들의 길 위에서 임팩트 커리어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김경하
김경하는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에서 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임팩트 측정·커뮤니케이션 회사 '트리플라잇'을 공동창업했다. 현재 더나은미래 편집국장으로서 임팩트 생태계의 주요 아젠다를 기획하고 편집 방향을 총괄하고 있다.
김규리
김규리는 2024년부터 더나은미래 기자로 임팩트 생태계에 입문한 새내기다. 그래픽 디자이너부터 강사, 앵커를 거치며 '내가 가진 역량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커리어를 횡단해 왔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공익 의제를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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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신 일반
임팩트 커리어의
진화와 분화
2025-3
김경하 & 김규리
Summary. 임팩트 커리어는 '좋은 일'을 너머 사회환경의 변화와 생태계의 성장 과정 가운데 진화하고 분화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경제 성장'은 한때 거의 종교에 가까운 신념이었다. 절대적 가난과 결핍의 시기를 벗어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압축 성장을 이뤘고, 성장 그 자체가 윤리로 작동했다. 성공은 '선'이었고, 효율은 '정의'였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그 신념의 붕괴를 상징했다. 한 세대가 쌓아올린 성장의 성채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개인은 국가의 이름으로 구조조정됐다.
경제 호황기 베이비붐 세대의 커리어는 '서류만 내면 합격하던 시절'을 상징했다. 일자리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다음 세대에게 일은 생존의 전장이었다. 성장률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자 청년들의 장래희망 1위는 공무원과 교사가 됐다. '안정'은 곧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관점을 낳는다. 저성장, 경기침체, 금융위기의 여파 속에서 일부 청년들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안정보다 의미를, 생존보다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 흐름에 불을 붙였다. 월스트리트의 탐욕이 초래한 이 사건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남겼다. 미국에서는 이를 계기로 '사회적 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윤을 내되,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은 낡은 자본주의를 향한 반성과 새로운 생태계에 대한 제안이었다.
한국에서도 이 흐름은 빠르게 수용됐다. 외환위기의 상처와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교차하던 시점이었다. 청년 세대는 이제 '좋은 일'이 경제의 언어로 작동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회를 바꾸는 일을 '지속가능한 일'로 만들다
"사회에 좋은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없을까?"
2000년대 중반, 이런 질문은 낯설고도 용감한 상상력이었다. 사회문제는 비판의 대상이었지, 직업의 언어로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물음에서 한국의 임팩트 커리어는 태동했다. 2006년,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넥스터스Nexters'라는 이름의 한국 최초 사회적기업가 연구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당시 한국은 사회적기업이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책상 앞에서 논문을 쓰는 대신 직접 현장을 향했다. 함께일하는재단(당시 실업극복국민재단)의 '2007 세계 희망경제 탐방 프로젝트'를 통해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사회적기업을 찾아 나섰다. 빈농에게 관개 장비를 공급하는 IDEI, 마이크로크레디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라민은행을 직접 방문하며, 사회적 기업가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의 원형을 눈으로 확인했다. 귀국 후에는 그 경험을 <아름다운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문제를 비판하는 대신 디자인하라."
그들이 배운 태도는 이후 한국 사회혁신 생태계의 근간이 됐다. 당시 멤버들은 프로젝트 기획서를 쓰고, 아이디어를 검증하며, 밤을 새워 토론했다고 회상한다. 단순히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닌 '실행'에 초점을 맞춘 동아리였다. 멤버 중 상당수가 한국을 대표하는 소셜벤처 창업자가 됐다.
'사람과 이야기'가 만든 내러티브의 힘
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움직인 것이 '사람' 그리고 '스토리'였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바꾼 대안기업가 80인', '보노보 혁명' 등 세계 사회혁신가를 인터뷰한 책은 당시 청년들에게 '임팩트 커리어 입문서'였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기업가가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은, 막연한 이상을 '할 수 있는 일'로 바꾸어 주었다.
스콜 재단이 강조하듯 사회변화의 핵심에는 언제나 '내러티브의 전환'이 있다. 낡은 규범을 해체하고, 대안적 서사가 설 자리를 만드는 일. 그것이 곧 변혁의 첫걸음이다. 한국의 청년 세대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문제를 비판하는 대신 자신만의 언어로 사회문제를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한국의 주요 매체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서사가 확산됐다. 2010년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가 창간 특집으로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시리즈를 보도한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잡 팩토리의 로버트 로스, 아쇼카의 빌 드레이튼, KIVA의 맷 플래너리 등 글로벌 사회혁신가들의 이야기는 한국 청년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남겼다. "세상을 바꾸는 일도 지속가능할 수 있다." 이제 '좋은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직업'은 공상이 아닌 하나의 커리어가 되기 시작했다.
'세계 Top 10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서' 시리즈를 보도한 더나은미래 제1호 (사진 출처: 더나은미래)
국가가 공익을 제도 속으로 끌어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기업은 대체로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태어났다. 복지의 공백을 시민이 메우며, 공동체가 시장의 언어를 빌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국은 시민의 운동이 아니라 '국가의 정책'으로 사회적기업을 제도화했다.
당시 정부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실업률은 급등했고, 여성의 사회참여와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돌봄·보육·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시장은 이런 사회서비스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정부는 긴급 처방으로 '공공근로'와 '자활근로' 사업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일자리는 일시적이었고 서비스 품질도 낮았다. 결국 '지속가능한 일자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커졌고, 2007년 '사회적기업 육성법'이 제정됐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사회적기업 육성법을 만든 나라였다.
이 법은 사회적기업을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며, 영업활동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기업'으로 정의했다. 그만큼 정부 인증 사회적기업 다수는 '취약계층 일자리형'이었고, '사회적 가치'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이 법은 공익을 복지의 영역에서 '시장과 고용의 언어'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행정이 공익을 제도화하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공적 의무'뿐만 아니라 '경제적 행위'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청년에게 '실험의 무대'를 열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청년 등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은 단순한 일자리 정책이 아니라, 청년들이 스스로 사회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식을 실험할 수 있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었다. 예비 창업팀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1년간 자금·공간·멘토링·네트워크를 지원받았다. 4년간 1,363개의 창업팀이 이 사업을 거쳐 나왔다. 정부가 무대를 만들고, 청년이 그 무대 위에서 '새로운 경제'를 실험했다.
뒤이어 대기업과 재단이 '공모전'이라는 두 번째 무대를 열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청년들을 경쟁을 통해 성장의 장으로 이끈 것이다. SK, 현대차, LG 등 기업이 청년 세대의 실험을 사회적 무대로 끌어올리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점차 하나의 커리어로서 윤곽을 갖추기 시작했다.
성수동, 사회혁신이 커리어가 된 거리
정부와 민간의 지원이 자본으로 전환되면서, 한국의 사회혁신 생태계는 '투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보조금의 논리가 지속가능성의 논리로 바뀌자, 사회혁신은 복지의 외곽이 아닌 경제의 한 축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2011년 정부가 조성한 사회적기업 전용 모태펀드는 단순한 보조금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 자본이었다. 이후 규모가 확대되며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처에도 본격적으로 투자금이 흘러들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여러 컨설팅 조직들이 임팩트 투자사로 비즈니스 모델을 확장했고, 성수동을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조직들이 함께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2014년, 루트임팩트는 사회혁신가를 위한 공동주거 공간을 조성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듯, 한 창업가를 키우려면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이 철학은 공간의 실험으로 이어졌다. 3년 뒤, 성수동 한복판에 지상 8층 규모의 코워킹 스페이스가 문을 열며 사회혁신가들의 '일과 삶이 만나는 실험장'이 탄생했다. 개관 초기부터 40여 개 팀이 입주했고, 성수동 일대는 빠르게 사회혁신의 거점으로 변모했다.
사회혁신가를 위한 코워킹 스페이스 '헤이그라운드' 개소 1주년을 맞아 루트임팩트 구성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루트임팩트)
이제 성수동 일대는 '소셜벤처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발달장애인을 고용해 비누를 만드는 '동구밭', 개발도상국 아동을 위한 교육용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스타트업 '에누마' 등 국내 대표 사회적 기업과 소셜벤처 1세대 중 상당수가 이곳을 거쳐갔다. 산업화 시대의 공장이 사라진 자리에, '사회적 가치'라는 새로운 산업이 들어선 셈이다. 2014년만 해도 사회적 목적을 지닌 조직은 10개 남짓이었지만, 2022년에는 500여 개로 늘었다.
행정 역시 이 변화를 하나의 '생태계 단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이곳 헤이그라운드에서 '소셜벤처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이후 정부들도 사회적경제 정책의 현장으로 성수동을 찾았다. 사람과 기업, 자원이 모이자, 정부 역시 그것을 생태계로 받아들였다.
커리어의 실험장: 현장에서 배우는 프로그램의 등장
기업과 조직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일자리의 확장을 의미했다. 성수동의 밀집된 거리감은 '커리어의 해상도'를 높여줬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자원봉사를 넘어 '지속가능한 일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덕분에 비록 조직의 규모는 작더라도 '조직 밖 동료'가 존재한다는 감각이 공유됐다.
2015년, 루트임팩트는 청년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 '임팩트 베이스캠프IBC'를 운영했다. IBC는 청년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을 기르고 이를 커리어와 연결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8~16주간 사회문제를 정의하고 직접 해결책을 도출하는 프로젝트 기반 학습Project-Based Learning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금까지 500명에 가까운 수료생이 배출됐고, 다양한 사회혁신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참가자들은 공통적으로 '임팩트를 업業으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감했다고 회상했다. 프로그램을 마친 이들은 현장에 합류해 선배들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보며, '좋은 의도가 일로 연결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배워갔다. 이 경험은 사회문제 해결이 이상이 아니라 직업의 언어로 실천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수료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변화를 계속 만들었다. 누군가는 비영리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또 다른 이는 청년의 강점을 기반으로 진로를 설계하는 소셜벤처를 세웠다. 지역 정치나 기후 운동 등 다른 영역으로 확장한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한 프로그램을 거친 청년들의 경로는 임팩트 커리어가 개인의 열정에 머무르지 않고, 생태계의 구조 속에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 임팩트 커리어 생태계의 또 다른 축
이 무렵, 바로 성수동 인근의 한양대학교에서도 같은 흐름이 자라나고 있었다. 2018년 한양대는 국내 최초로 아쇼카UAshoka U에 지정되며, 대학이 사회혁신을 제도 교육 안으로 끌어들였다. 캠퍼스에서는 사회혁신 교과목과 비교과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학생들은 사회문제를 학문이 아니라 현장과 '일의 언어'로 배우기 시작했다. 현장형 프로젝트, 지역 연계 수업 등이 이어지면서 대학은 임팩트 생태계의 또 다른 축이 되었다.
한양대생들이 창업한 소셜벤처 '카이나'가 필리핀 현지조사를 떠난 현장.
'카이나'는 한식 프랜차이즈로 현지 여성들의 자립을 돕는다. (사진 출처: 한양대 사회혁신센터)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거대한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통의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수동의 창업가들에게도 그 이야기가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 믿음이 사람을 모으고, 공간을 연결하고, 자원을 끌어왔다.
그렇게 한국의 임팩트 생태계는 사람에서 시작해 공간으로 그리고 커리어로 확장됐다. 성수동의 풍경은 단순한 산업의 변화가 아니라, 일의 가치가 바뀌는 현장이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첫 직장을, 누군가는 두 번째 도전을, 또 누군가는 인생의 전환점을 찾았다.
ESG의 부상과 임팩트 커리어의 변곡점
임팩트 커리어의 또 하나의 변곡점은 ESG의 부상과 함께 찾아왔다. 2020년,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의 래리 핑크 회장은 CEO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환경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업의 기후 리스크 대응과 사회적 책임을 핵심 투자 판단 기준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 한 문장은 세계 자본시장의 언어를 바꿔놓았다. 이후 ESG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고, 글로벌 투자 흐름이 ESG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더불어 2019년 미국의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usiness Roundtable'은 181명의 글로벌 대기업 CEO들이 모여 '기업의 목적purpose' 선언문을 발표했다. 주주 이익 극대화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객·직원·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방향을 공식화한 것이다.
제도화된 ESG, 기업의 언어로 들어오다
이 흐름은 한국 기업에도 빠르게 번졌다. 대기업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필수적으로 발간했고, ESG 위원회가 이사회 한켠을 차지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부 기업만이 자율적으로 CSR 보고서를 내던 시절이었지만, 2023년 기준 국내 매출 상위 30대 기업은 모두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했다. 기업은 기후위기를 '좌초자산'의 문제로, 공급망 인권 리스크를 '경영 리스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책임이 곧 기업의 생존 조건이 된 것이다. 이처럼 ESG가 기업의 언어가 되자, 사회문제를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 언어'가 필요해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법률과 컨설팅 분야였다. 2021년, 김앤장, 율촌, 광장, 태평양 등 국내 4대 로펌이 일제히 ESG 전담 조직을 출범시켰다. 환경·노동·공정거래·컴플라이언스 전문가 수십 명이 투입됐고, 웨비나에는 수백 명이 넘는 기업 관계자들이 몰렸다. 과거 사회공헌 담당 부서가 기업의 '선의'를 대변했다면, 이제 ESG 대응팀은 '리스크 관리의 최전선'이 되었다. 기업은 법률 자문과 규제 해석, 공시 가이드라인을 통해 ESG를 '감성의 언어'가 아닌 '컴플라이언스의 언어'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대로부터 솟아오른 변화의 압력
그러나 ESG의 확산은 제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변화의 불씨는 세대가 지폈다. 2019년, 스웨덴의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시작한 '기후파업'은 전 세계 청소년들의 언어가 됐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운동은 한국에서도 '청소년 기후행동'으로 번졌고, 청소년들은 헌법소원까지 제기하며 '기후위기는 생존의 문제'라고 외쳤다.
2022년, 청소년기후행동이 서울 종로구에서 진행한 '기후파업' (사진 출처: 청소년기후행동)
젊은 세대의 감수성은 곧 소비 행동으로 옮겨갔다. 남양유업은 대리점 갑질과 폐쇄적인 사내문화로 '불매 1순위 기업'이 되었고, 결국 오너 경영 체제가 무너졌다. SPC그룹 역시 잇따른 공장 사망사고와 불법 파견 논란으로 ESG 리스크가 폭발했다. 온라인에서 확산된 불매운동은 매출로 그리고 주가로 이어졌다. 소비자는 더 이상 정보의 수용자가 아니라, 기업의 윤리를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가치 행동자'가 된 것이다.
이 세대는 인권 감수성을 체화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체벌이 금지되고, 괴롭힘은 신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배우며 자랐다. 부당한 대우는 '참는 것'이 아니라 '시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러나 막상 사회에 나와 맞닥뜨린 현실은 달랐다. 업무를 빙자한 괴롭힘, 침묵을 강요하는 조직문화, 안전보다 속도를 앞세우는 현장이 여전했다. 인권이 기본이 된 세대에게 이런 풍경은 낡은 폭력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조직보다 개인이 먼저다."
ESG를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세대는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많은 기업은 여전히 그들의 인식을 따라가지 못한다. 기성세대가 ESG를 '규제와 평판의 언어'로 해석할 때, MZ세대는 그것을 '존중과 인권의 언어'로 이해한다. ESG의 압력은 시장뿐만 아니라 조직 안의 젊은 구성원들로부터도 오고 있다.
임팩트 커리어, 전문직의 언어를 얻다
이처럼 주류가 ESG를 중심으로 제도화의 언어로 움직이는 동안, 성수동을 중심으로 한 임팩트 생태계는 '의미의 언어'로 진화했다. ESG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에 답했다면, 이들은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임팩트는 이제 정량적 평가의 대상이자 전략의 중심이 됐다. 한쪽은 시장을 정비했고, 다른 한쪽은 가치를 정교화했다. 주류의 제도화와 주변부의 실험이 동시에 진화하면서, 임팩트 커리어는 비로소 전문직의 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누가 이 복잡한 변화를 설계하고 관리할 것인가'였다. ESG와 임팩트 투자의 확산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전문 인력을 필요로 했다. 임팩트 측정과 관리IMM, 기후 리스크 분석, 이해관계자 커뮤니케이션 등은 사회문제를 직관이 아닌 데이터와 논리로 다루는 시대를 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임팩트 전문직Impact Professionals'이다.
임팩트리서치랩, 트리플라잇 등 2019년 이후 등장한 여러 연구기관들은 사회적 변화를 수치로 번역하고, 기업의 행동을 정량화하기 시작했다. 사회적기업가가 변화를 '만들었다면', 임팩트 전문가는 그 변화를 '측정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임팩트'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지만, 이제는 기업이 먼저 '우리의 임팩트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는 임팩트 커리어가 감성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신념의 실천에서 전문성의 체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와 생존이 만나는 '일의 윤리'를 묻다
임팩트 커리어는 직업의 변천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일의 의미'를 학습해 온 과정이다. 2000년대의 태동은 '좋은 일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상상력이었고, 2010년대의 집적은 '함께 일하면 바꿀 수 있다'는 구조의 발견이었다. 그리고 2020년대의 전환은 '존중받으며 일한다'는 윤리의 시대다. 성장의 시대가 효율의 윤리를 낳았다면, 전환의 시대는 공감과 존엄의 윤리를 요구한다. 임팩트 커리어는 특별한 직업이 아니라, 저성장 시대의 생존 방식이자 일의 새로운 윤리다.
이제 Z세대가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임팩트 커리어는 더 이상 주변부의 대안이 아니다. 딜로이트의 '2024 글로벌 밀레니얼·Z세대 서베이'에 따르면, Z세대의 89%, 밀레니얼의 92%가 "직업의 목적 의식이 자신의 행복과 직결된다"고 답했다. 그들은 급여보다 '의미'를, 직함보다 '영향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이 세대가 추구하는 '의미'는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려는 '이중의 실천가'다. 기부나 자선으로 대표되던 과거의 공익 활동이 이제는 '임팩트 투자', '소셜 비즈니스', '비영리 스타트업'이라는 새로운 경제 생태계로 재편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과 가치를 기반으로 지속가능하게 일하는 방식이 같은 문장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다
이 변화의 뿌리는 위기 경험에 있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통과한 세대는 불안정과 불평등의 시대를 마주했다. 안정된 일자리만으로는 삶의 균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일의 목적을 '생존'에서 '기여'로 옮겼다. 그 결과, 노동시장은 '무엇을 하는가'보다 '왜 하는가'를 묻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기업 역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조직의 목적이 모호하면 인재를 잃는 시대, 인재 확보의 경쟁력은 이제 '임팩트 서사'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시하느냐에 달려 있다.
ESG와 임팩트 투자는 이런 전환을 제도화했다. 과거 기업에서 '사회적 가치'는 기부나 홍보의 영역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경영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자선이 아니라 비즈니스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직무와 산업이 생겨났다.
기업 안에는 ESG 전담조직과 임팩트 직무가 만들어지고, 재무 성과와 사회 성과를 함께 설계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했다. 기업이 사회문제의 해결자로서 책임을 다할 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커리어 역시 임팩트 커리어가 된다. 이제 '임팩트 커리어'란 조직의 성격이 아닌 일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변화하고 있다.
임팩트 커리어의 부상은 하나의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일의 의미에 대한 세대적 학습이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이 새로운 노동 윤리는, 한국 사회가 성장의 언어에서 공존의 언어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치 있는 일'은 더 이상 이상이 아니다. 지금, 그 변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선善'을 설계하고 있다. 결국 그들의 일은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나는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그 질문에 끝까지 답하려는 사람들, 그들의 길 위에서 임팩트 커리어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김경하
김경하는 조선일보 공익섹션 '더나은미래'에서 기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임팩트 측정·커뮤니케이션 회사 '트리플라잇'을 공동창업했다. 현재 더나은미래 편집국장으로서 임팩트 생태계의 주요 아젠다를 기획하고 편집 방향을 총괄하고 있다.
김규리
김규리는 2024년부터 더나은미래 기자로 임팩트 생태계에 입문한 새내기다. 그래픽 디자이너부터 강사, 앵커를 거치며 '내가 가진 역량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커리어를 횡단해 왔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공익 의제를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