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신뢰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재단, 협력을 우선하다
김진아
Summary. 신뢰는 투명성을 넘어 공감과 협력의 가치를 실현하고, 공익적 기부문화를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변화를 만드는 데 핵심이다.
“이게 뭐지?”
2008년 아름다운재단에 입사한 나는 첫 월급을 받던 날, 깜짝 놀랐다. 아름다운재단 홈페이지에 내 이름과 급여가 고스란히 공개돼 있던 것이다. 공지사항에는 상임이사부터 간사까지, 모든 재단 구성원의 급여가 공개돼 있었다.
그대로 보여주기를 넘어
홈페이지에 공개된 것은 급여만이 아니었다. 재단의 회계자료도 공개돼 있었다. 매월 공지되는 ‘월별 수입지출 장부’를 통해 첨부파일만 열면 누구든지 한 달 동안 재단을 들고 나는 회계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파격적 행보였다. 2000년대 한국사회는 기부문화의 태동기였고, 어떤 비영리기관도 이토록 투명하게 자료를 공개하는 경우는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이유가 궁금했던 나는 선배 간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재단은 태생부터 시민들과 함께 시작한 재단이야. 그렇다 보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시민 기부자들과의 신뢰고, 특히 기부자의 목적형 기금으로 운영되는 재단법인이니, 그 자금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겠지.”
아름다운재단은 2000년, 미국의 지역재단을 모델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시민공익재단이다.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 종교 등 독점된 권력의 영향 없이 시민들의 참여로 설립된 아름다운재단은 말 그대로 ‘시민이 주인’인 재단이다.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아름다운재단 <1%나눔캠페인>의 슬로건은 재단의 지향을 잘 드러낸다. 평범한 시민 그 누구라도 나눔에 참여할 수 있으며, 거기서 진정한 나눔이 시작된다는 아름다운재단의 지향은 시민 기부자들과의 신뢰 구축과 활발한 소통에 집중하게 하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투명한 회계자료 공개와 같은 방식으로 기부자와의 신뢰를 쌓아가던 노력은 10여 년이 지속된 뒤 다른 방법으로 전환해야 했다. 개인정보 공개에 대한 시대적 인식 변화와 회계정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서 기부자들에게 생기는 오해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재단은 중요한 배움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신뢰란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었다.
흔들리며 정체성을 찾아가다
재단 설립 후 10년이 흐르고,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거버넌스의 변화가 컸다. 창립을 주도했던 이사회 구성원이 떠나니 자연스럽게 재단이 가는 방향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무국의 최고책임자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다른 모금기관이나 기업에서 경험을 쌓아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책임자가 재단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사무국 구성원도 달라지고 있었다. 창립 초기 재단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떠나고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무국 구성원들이 재단에 입사했다. 아름다운재단 안팎의 변화는 조직 내부에 어려운 현실로 나타났다.
재단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이 의사결정에 대한 내부 공감대의 취약성으로 이어졌다. 취약해진 내부 공감으로 리더십이 발휘되기 어려워졌고, 나아가 조직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 종종 커뮤니케이션의 오해가 발생했고, 조직 구성원들의 상호 신뢰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상이몽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시기였다. 재단 바깥의 목소리도 있었다. “아름다운재단이 창립 초기 보여주었던 차별성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며 “재단의 정체성부터 사업구조까지 혁신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재단이 가야 할 방향을 뚜렷이 하고 재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염려 섞인 목소리도 있었다. 재단 안쪽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안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이정표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창립 20주년이 되던 해, 아름다운재단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미션과 비전, 핵심가치를 새롭게 수립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름다운재단이 선 자리를 재확인하고 가야할 길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아름다운재단을 함께 이끌고 있는 이사회와 사무국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사회와 사무국에서 13인의 대표를 선출하고, 미션과 비전 수립을 위한 워크숍을 추진했다. 일종의 이사회와 사무국 간 거버넌스를 구축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거버넌스에 참여한 20년 차 이사도, 3년 차 매니저도 모두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논의를 풀어간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위한 출발점은 ‘창립선언문’이었다. 우리가 가진 존재 이유에서부터 다시 서고자 한 것이다. 13인의 대표가 조직의 방향과 목표를 재점검하고 갈무리한 뒤, 우리가 어떤 미션과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사무국의 모든 구성원의 의견을 들었다. 여러 차례 워크샵을 열어 토론하고, 공감하며, 의사결정하는 시간을 가지며 아름다운재단은 새로운 미션과 비전, 핵심가치를 만들어 냈다. 총 508일, 12,192시간, 71명이 함께 한 결과였다. 새로운 정체성은 다음과 같다.
미 션 ㅣ 모두를 위한 변화, 변화를 만드는 연결
비 전 ㅣ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참여와 나눔을 잇는 도전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핵심가치 ㅣ 공익, 도전, 포용, 협력, 투명
과정이 쉽지 않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로 서로의 생각이 충돌하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돌아서기도 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재단 모든 구성원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길에서 큰 선물을 얻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신뢰’였다.
신뢰의 방정식을 만들다
<트러스트 어드바이저The trust advisor>의 저자인 전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데이비드 H. 마이스터David H. Maister는 그의 책을 통해 신뢰를 구성하는 방정식을 제시했다. 그가 말하는 신뢰는 전문성과 정직함에서 비롯되는 믿음Credibility, 약속과 이행이 연결된 경험의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예측가능성Reliability, 그리고 정서적 친밀감Intimacy의 총합을 이기적 성향Self-interest으로 나눈 것이다. 이 신뢰방정식은 인간관계 분석에서 나온 것이지만, 나는 이 방정식을 아름다운재단의 신뢰를 구축하는데 적용해볼 수 있었다. 핵심적인 4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았다.
아름다운재단은 적합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정직하게 관리되고 있는가? (믿음)
아름다운재단은 약속한 사업의 목적이 달성되도록 노력하며 일관성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가? (예측가능성)
아름다운재단은 기부자와 가깝게 소통하고 있는가 (친밀함)
아름다운재단의 활동이 기관의 이익을 넘어 비영리 생태계, 나아가 사회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이기적 성향)
미국의 지역재단을 모델로 설립된 아름다운재단의 재원에는 구조적 특징이 있다. 바로 목적형 기금을 통해 운영된다는 것이다. 이 재원구조의 장점은 목적형 기금을 통해 중장기 사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금은 조성의 목적이 있고, 이 목적에 따른 사업을 개발,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한번 조성된 기금은 일회성 사업에 사용될 때도 있지만, 지속적인 추가 기부를 통해 기금목적에 맞는 사업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다. 이런 목적형 기금은 특히 재원과 사업의 예측가능성을 제공한다. 목적형 기금은 약속한 사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재원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런 구조는 많은 기부자들이 아름다운재단을 믿고 찾는 배경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뢰방정식에서 언급된 ‘예측가능성’이다.
하지만 목적형 기금은 관리가 어렵다. 쉽게 말해 상당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현재 아름다운재단에는 60여 개의 목적형 기금이 관리되고 있는데, 기금 각각의 설립 목적과 집행되는 사업이 다양하다. 그렇다보니 고도화된 기부자 관리와 사업 관리, 회계 관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내부 협업과 커뮤니케이션도 매우 중요하다. 각각의 사업들이 모두 뉴런처럼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미친다. 그런 맥락에서 기금 관리에는 상당한 ‘전문성’이 필수적이다.
다른 특징도 있다. 아름다운재단은 창립 때부터 늘 기부자들과 함께 해왔다. 많은 모금기관이 유명인을 홍보대사로 선정해 활동할 때, 아름다운재단은 포스터에 시민 기부자의 얼굴을 실었다. 구두를 닦는 사람이건, 슈퍼마켓 운영자건, 학교 교사건, 회사 CEO건 상관없이 모두 다 같은 기부자였다. 기부자가 스스로 참여하고 직접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사업을 기획했다. 아름다운재단의 로고도 기부자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졌다. 얼마 전 개최됐던 기부자 초청 행사에는 20여 명에 가까운 기부자들이 진행요원으로 나섰다. 기부자들이 직접 호스트가 되고, 다른 기부자들에게 다양한 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아름다운재단은 기부자들을 봉사하는 객체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호스트가 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해왔다. 최근 들어 커뮤니케이션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며, 특히 SNS를 통해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콘텐츠나 정보를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재단이 시민과 ‘친밀감’을 형성하고 신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올해 들어 가장 큰 변화는 최근 이사회의 구성원으로 두 분의 기부자를 위촉한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준비하며 사실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다. 첫 미팅에서 이사로 추천받은 기부자 중 한 분이 이렇게 물었다.
“기부자를 이사로 참여시키면 재단으로서도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름다운재단은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늘 기부자님들의 참여로 이뤄져 왔습니다. 기부자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려 노력해 왔고요. 기부자님들이 이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하는 것이 지난 24년간 기부자와의 친밀한 신뢰를 만들어온 재단으로서는 당연한 다음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뢰가 우리의 브랜드가 된다면
최근 비영리 생태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비영리기관들의 전통적인 모금과 사업의 방식만으로는 기부도, 사업도 해결하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블록체인이나 AI와 같은 기술의 개발도 있겠지만, 가장 큰 변화에는 시민, 즉 기부자가 있다. 기부자로서 시민은 이제 더 이상 비영리기관이 보여주는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관을 찾고, 나의 기부와 연결이 어디로 향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신뢰’라는 가교를 통해 확장된다. 최근 ‘제약 없는 비용 사용’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루트임팩트의 IP1 기금이나 ‘젊치인’을 후원하며 열렬한 팬덤기부를 만들어내고 있는 뉴웨이즈, 손편지로 타인의 고민에 응답하는 활동을 하는 온기우편함과 같은 활동의 핵심에는 모두 ‘신뢰’가 숨 쉬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은 공익적 기부문화를 선도하는 재단이다.”
창립선언문의 첫 문장이다. 아름다운재단은 특정 개인이나 기업, 종교의 가치를 넘어 이 사회의 ‘공익적 기부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 공익적 기부문화가 제시하는 방향은 기관의 물리적 지속가능성이 아닌 궁극적인 사회변화를 향해 있다. 우리가 말하는 더 나은 사회란 결국 공익적인 기부문화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회변화란 결국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진아
김진아 사무총장은 아름다운재단에서 15년간 근속한 뒤, 내부 선발 1호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회복지, 공공정책을 전공했으며, 현재 사회적경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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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란트로피
신뢰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재단, 협력을 우선하다
김진아
Summary. 신뢰는 투명성을 넘어 공감과 협력의 가치를 실현하고, 공익적 기부문화를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변화를 만드는 데 핵심이다.
“이게 뭐지?”
2008년 아름다운재단에 입사한 나는 첫 월급을 받던 날, 깜짝 놀랐다. 아름다운재단 홈페이지에 내 이름과 급여가 고스란히 공개돼 있던 것이다. 공지사항에는 상임이사부터 간사까지, 모든 재단 구성원의 급여가 공개돼 있었다.
그대로 보여주기를 넘어
홈페이지에 공개된 것은 급여만이 아니었다. 재단의 회계자료도 공개돼 있었다. 매월 공지되는 ‘월별 수입지출 장부’를 통해 첨부파일만 열면 누구든지 한 달 동안 재단을 들고 나는 회계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파격적 행보였다. 2000년대 한국사회는 기부문화의 태동기였고, 어떤 비영리기관도 이토록 투명하게 자료를 공개하는 경우는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이유가 궁금했던 나는 선배 간사의 이야기를 듣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다운재단은 태생부터 시민들과 함께 시작한 재단이야. 그렇다 보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시민 기부자들과의 신뢰고, 특히 기부자의 목적형 기금으로 운영되는 재단법인이니, 그 자금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겠지.”
아름다운재단은 2000년, 미국의 지역재단을 모델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시민공익재단이다.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 종교 등 독점된 권력의 영향 없이 시민들의 참여로 설립된 아름다운재단은 말 그대로 ‘시민이 주인’인 재단이다.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아름다운재단 <1%나눔캠페인>의 슬로건은 재단의 지향을 잘 드러낸다. 평범한 시민 그 누구라도 나눔에 참여할 수 있으며, 거기서 진정한 나눔이 시작된다는 아름다운재단의 지향은 시민 기부자들과의 신뢰 구축과 활발한 소통에 집중하게 하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투명한 회계자료 공개와 같은 방식으로 기부자와의 신뢰를 쌓아가던 노력은 10여 년이 지속된 뒤 다른 방법으로 전환해야 했다. 개인정보 공개에 대한 시대적 인식 변화와 회계정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서 기부자들에게 생기는 오해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재단은 중요한 배움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신뢰란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었다.
흔들리며 정체성을 찾아가다
재단 설립 후 10년이 흐르고,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거버넌스의 변화가 컸다. 창립을 주도했던 이사회 구성원이 떠나니 자연스럽게 재단이 가는 방향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무국의 최고책임자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다른 모금기관이나 기업에서 경험을 쌓아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책임자가 재단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사무국 구성원도 달라지고 있었다. 창립 초기 재단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떠나고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가진 사무국 구성원들이 재단에 입사했다. 아름다운재단 안팎의 변화는 조직 내부에 어려운 현실로 나타났다.
재단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이 의사결정에 대한 내부 공감대의 취약성으로 이어졌다. 취약해진 내부 공감으로 리더십이 발휘되기 어려워졌고, 나아가 조직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 종종 커뮤니케이션의 오해가 발생했고, 조직 구성원들의 상호 신뢰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상이몽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시기였다. 재단 바깥의 목소리도 있었다. “아름다운재단이 창립 초기 보여주었던 차별성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며 “재단의 정체성부터 사업구조까지 혁신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재단이 가야 할 방향을 뚜렷이 하고 재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염려 섞인 목소리도 있었다. 재단 안쪽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안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고 이정표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창립 20주년이 되던 해, 아름다운재단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미션과 비전, 핵심가치를 새롭게 수립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름다운재단이 선 자리를 재확인하고 가야할 길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아름다운재단을 함께 이끌고 있는 이사회와 사무국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사회와 사무국에서 13인의 대표를 선출하고, 미션과 비전 수립을 위한 워크숍을 추진했다. 일종의 이사회와 사무국 간 거버넌스를 구축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거버넌스에 참여한 20년 차 이사도, 3년 차 매니저도 모두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논의를 풀어간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정체성 확립을 위한 출발점은 ‘창립선언문’이었다. 우리가 가진 존재 이유에서부터 다시 서고자 한 것이다. 13인의 대표가 조직의 방향과 목표를 재점검하고 갈무리한 뒤, 우리가 어떤 미션과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사무국의 모든 구성원의 의견을 들었다. 여러 차례 워크샵을 열어 토론하고, 공감하며, 의사결정하는 시간을 가지며 아름다운재단은 새로운 미션과 비전, 핵심가치를 만들어 냈다. 총 508일, 12,192시간, 71명이 함께 한 결과였다. 새로운 정체성은 다음과 같다.
미 션 ㅣ 모두를 위한 변화, 변화를 만드는 연결
비 전 ㅣ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시민참여와 나눔을 잇는 도전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핵심가치 ㅣ 공익, 도전, 포용, 협력, 투명
과정이 쉽지 않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로 서로의 생각이 충돌하기도 하고 답답한 마음에 돌아서기도 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재단 모든 구성원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길에서 큰 선물을 얻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신뢰’였다.
신뢰의 방정식을 만들다
<트러스트 어드바이저The trust advisor>의 저자인 전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 데이비드 H. 마이스터David H. Maister는 그의 책을 통해 신뢰를 구성하는 방정식을 제시했다. 그가 말하는 신뢰는 전문성과 정직함에서 비롯되는 믿음Credibility, 약속과 이행이 연결된 경험의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예측가능성Reliability, 그리고 정서적 친밀감Intimacy의 총합을 이기적 성향Self-interest으로 나눈 것이다. 이 신뢰방정식은 인간관계 분석에서 나온 것이지만, 나는 이 방정식을 아름다운재단의 신뢰를 구축하는데 적용해볼 수 있었다. 핵심적인 4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해보았다.
아름다운재단은 적합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정직하게 관리되고 있는가? (믿음)
아름다운재단은 약속한 사업의 목적이 달성되도록 노력하며 일관성 있게 사업을 추진하는가? (예측가능성)
아름다운재단은 기부자와 가깝게 소통하고 있는가 (친밀함)
아름다운재단의 활동이 기관의 이익을 넘어 비영리 생태계, 나아가 사회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 (이기적 성향)
미국의 지역재단을 모델로 설립된 아름다운재단의 재원에는 구조적 특징이 있다. 바로 목적형 기금을 통해 운영된다는 것이다. 이 재원구조의 장점은 목적형 기금을 통해 중장기 사업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금은 조성의 목적이 있고, 이 목적에 따른 사업을 개발,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한번 조성된 기금은 일회성 사업에 사용될 때도 있지만, 지속적인 추가 기부를 통해 기금목적에 맞는 사업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다. 이런 목적형 기금은 특히 재원과 사업의 예측가능성을 제공한다. 목적형 기금은 약속한 사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재원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런 구조는 많은 기부자들이 아름다운재단을 믿고 찾는 배경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뢰방정식에서 언급된 ‘예측가능성’이다.
하지만 목적형 기금은 관리가 어렵다. 쉽게 말해 상당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현재 아름다운재단에는 60여 개의 목적형 기금이 관리되고 있는데, 기금 각각의 설립 목적과 집행되는 사업이 다양하다. 그렇다보니 고도화된 기부자 관리와 사업 관리, 회계 관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내부 협업과 커뮤니케이션도 매우 중요하다. 각각의 사업들이 모두 뉴런처럼 연결되어 있고 영향을 미친다. 그런 맥락에서 기금 관리에는 상당한 ‘전문성’이 필수적이다.
다른 특징도 있다. 아름다운재단은 창립 때부터 늘 기부자들과 함께 해왔다. 많은 모금기관이 유명인을 홍보대사로 선정해 활동할 때, 아름다운재단은 포스터에 시민 기부자의 얼굴을 실었다. 구두를 닦는 사람이건, 슈퍼마켓 운영자건, 학교 교사건, 회사 CEO건 상관없이 모두 다 같은 기부자였다. 기부자가 스스로 참여하고 직접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사업을 기획했다. 아름다운재단의 로고도 기부자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졌다. 얼마 전 개최됐던 기부자 초청 행사에는 20여 명에 가까운 기부자들이 진행요원으로 나섰다. 기부자들이 직접 호스트가 되고, 다른 기부자들에게 다양한 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아름다운재단은 기부자들을 봉사하는 객체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호스트가 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해왔다. 최근 들어 커뮤니케이션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며, 특히 SNS를 통해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콘텐츠나 정보를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재단이 시민과 ‘친밀감’을 형성하고 신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올해 들어 가장 큰 변화는 최근 이사회의 구성원으로 두 분의 기부자를 위촉한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준비하며 사실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다. 첫 미팅에서 이사로 추천받은 기부자 중 한 분이 이렇게 물었다.
“기부자를 이사로 참여시키면 재단으로서도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름다운재단은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늘 기부자님들의 참여로 이뤄져 왔습니다. 기부자님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려 노력해 왔고요. 기부자님들이 이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하는 것이 지난 24년간 기부자와의 친밀한 신뢰를 만들어온 재단으로서는 당연한 다음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뢰가 우리의 브랜드가 된다면
최근 비영리 생태계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비영리기관들의 전통적인 모금과 사업의 방식만으로는 기부도, 사업도 해결하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블록체인이나 AI와 같은 기술의 개발도 있겠지만, 가장 큰 변화에는 시민, 즉 기부자가 있다. 기부자로서 시민은 이제 더 이상 비영리기관이 보여주는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관을 찾고, 나의 기부와 연결이 어디로 향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신뢰’라는 가교를 통해 확장된다. 최근 ‘제약 없는 비용 사용’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루트임팩트의 IP1 기금이나 ‘젊치인’을 후원하며 열렬한 팬덤기부를 만들어내고 있는 뉴웨이즈, 손편지로 타인의 고민에 응답하는 활동을 하는 온기우편함과 같은 활동의 핵심에는 모두 ‘신뢰’가 숨 쉬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은 공익적 기부문화를 선도하는 재단이다.”
창립선언문의 첫 문장이다. 아름다운재단은 특정 개인이나 기업, 종교의 가치를 넘어 이 사회의 ‘공익적 기부문화’를 선도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 공익적 기부문화가 제시하는 방향은 기관의 물리적 지속가능성이 아닌 궁극적인 사회변화를 향해 있다. 우리가 말하는 더 나은 사회란 결국 공익적인 기부문화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회변화란 결국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진아
김진아 사무총장은 아름다운재단에서 15년간 근속한 뒤, 내부 선발 1호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회복지, 공공정책을 전공했으며, 현재 사회적경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