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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식민주의는 어떻게
사회경제적 격차를 발생시켰나?
글로벌 시리즈: 평등을 향한 도전
NAGATSUGU ASATO · NOBUO SHIGA
Summary. 식민주의로 인해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사이에 불균형한 권력관계가 고착되었다. 하지만 정책적 변화를 통해 이를 개선할 수 있다.
식민주의의 유산은 전 세계적으로 구조적인 차별을 심화시켜왔다. 또한 지배당하고 소외된 지역을 고립과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들게 했다. 일본에서 그 유산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지역은 한때 독립국이었다가 17세기 초에 최초로 점령당한 오키나와이다. 오키나와의 빈곤율은 35%로 전국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실업률, 비정규직 비율, 한부모 가정 비율도 전국에서 가장 높다. 한편 대학 진학률은 가장 낮다.
이 심각한 빈곤의 이면에는 면적이 국토 전체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현에 일본 내 미군 시설의 70% 이상이 몰려 있다는 중대한 사실이 있다. 이렇게 밀집된 군사시설이 지역 경제와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왔는데도 불구하고 정부 각 기관에서는 안보상 필요하다거나 군사시설을 유치하는 대가로 국가가 경제적 지원을 얻는다며 이를 정당화해 왔다.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에서 빈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강력한 가족 간 유대와 지역적 뿌리로 인한 현지 특유의 순응 압력과 낮은 자존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피상적이며 핵심적인 문제를 비켜난 것이다. 빈곤과 군사 시설이 오키나와에 집중된 것은 근대적 형태의 식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사이의 권력 역학 관계가 야기하는 구조적 불평등이 그 원인이다.
구조적 차별이란 특정 집단에 계속해서 가하는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인 차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차별을 바로잡고자 할 때는 특별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차별은 사람들이 의식조차 못 하고 살아갈 정도로 일상생활 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온정적 편견benevolent prejudice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데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오키나와의 자연환경, 환대, 놀이 문화, 건강식 등을 칭송하면서 일본 본토와는 다른 오키나와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또한 의도치 않게 오키나와의 빈곤과 지역 주민들의 가치관, 행동양식을 연결 지을 수 있다.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인지하지 못하는 일본인이 많은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에 가해진 억압의 역사적 맥락과 그것이 지속되는 이유, 그리고 이 지역이 공정하게 대우받도록 하기 위해 정책입안자와 시민들이 담당할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억압의 역사
오키나와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역사적 사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오키나와는 한때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지만, 도쿠가와 시대인 1609년 일본의 강력한 봉건 영지 중 하나였던 사쓰마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해 정복함으로써 무역상의 이점을 확보하고 군사적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발판을 마련했다. 도쿠가와 막부 몰락 후 봉건제를 폐지한 메이지 정부는 1897년에 공식적으로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일본 정부가 두드러지게 오키나와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본토를 방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제2차대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였다. 민간인 사상자가 10만 명에 달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해 일본 침공 작전의 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해에 전쟁이 끝나자 일본 정부는 미국이 아시아에서의 군사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점령하도록 허용하는 대가로 전쟁포기 조항9조이 담긴 새 헌법을 제정했다.
중요한 사실은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철도가 초토화되었고 전후 도로 건설은 주로 미군의 이익을 위해 시행되었으며, 오키나와 주요 산업원이던 농지의 상당 부분에 군사 시설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미군정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와 같은 수준의 전후 재건 자금을 투자받지 못해 사회적 산업적 기반 개발이 크게 뒤처졌다.
1971년 오키나와와 그 외 일본 영토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 해결을 목표로 한 오키나와진흥개발특별조치법沖縄振興開発特別措置法이 통과되었지만, 이 법에 따라 집행된 공공사업 예산 중 절반 정도는 대형 건설사를 통해 다시 본토로 흘러 들어갔다.
좌절당한 변화의 목소리
미국은 오키나와를 계속 지배했고 베트남전이 발발하자 오키나와를 보급 기지와 출격 기지로 활용했다. 이 시기 오키나와에서는 반식민 평화운동이 급성장해 일본 본토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 모두 이러한 운동을 억눌러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미국은 1972년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했지만 재정적 부담도 지지 않고 점거 행위에 대해 국제적으로 비판받는 일도 없이 기지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반환을 공식화함으로써 국가주의 정서를 조성했고, 오키나와를 미일 안보 체제 유지에 핵심적인 지역으로 남겨 두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후로 지금까지도 일본 사법 당국은 미일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인해 미군 성폭행을 비롯한 각종 폭력 행위 사건을 직접 조사하지 못하고 있다. 이 협정을 전면 개정하라는 요구가 전국적으로 이어져 왔는데도 반세기가 넘도록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지 이전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대 일본 방위성 장관들은 군사 시설을 현 외부로 이전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인정했지만, 현실적으로 본토의 동의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2009년 선거에서 후텐마에 있는 미 공군 기지를 오키나와 외부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나 이듬해에 스스로 철회했다. 그래도 2019년 2월 후텐마를 대신해 역시 오키나와 현내 지역인 헤노코에 새 기지를 건설하는 안을 놓고 현내 모든 유권자를 대상으로 구속력 없이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70% 이상이 반대표를 던졌고 이후로도 시민들은 계속해서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다. (이 글의 공동 저자인 아사토 나가쓰구는 오키나와의 일을 주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헤노코 주민투표위원회 부대표로 활동했다.)
형평성과 자기결정권을 향해
하버드 법학대학원 교수 J. 마크 램지어J. Mark Ramseyer는 ‘하층민의 감시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했거나 강제로 이주당한 조선인의 후손이 대부분인) 재일조선인, (역사적으로 배척당해 온) 부라쿠민部落民, 오키나와 주민 등 일본 내 소수집단들은 대체로 정부 보조금을 얻으려고 인권 침해 구제와 대책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오키나와의 빈곤, 그리고 낮은 학업 수준과 높은 이혼율 및 혼외 출생아 수 등 유독 오키나와에서 두드러지는 문화적 현상이 오키나와 고유의 문화적 특성이나 특유의 문화적 유산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오키나와 현지 언론에서는 이 논문이 인종차별, 특히 고유한 역사에서 비롯한 문화, 언어, 종교, 전통, 관습의 차이에 따른 차별인 문화적 인종차별의 중대한 사례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차별적 시선은 오키나와의 극심한 빈곤의 이면에 깔린 구조적 차별과 착취의 역할을 간과한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현지의 필요를 희생시켜 본토의 복지, 안전,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정치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조건뿐 아니라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데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단마저 박탈하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 헌법 14조 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인종, 신조信條, 성별, 사회적 신분 또는 가문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차별받지 아니한다.” 면밀히 살펴보면 이 조항에는 역사적으로 특정 속성에 기반한 차별로 낮은 지위에 놓인 집단이 있다면 이를 해결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동안 일본의 헌법학자와 법조인은 이 조항을 광범위한 평등권이 아닌 특정 개인의 권리 측면에서의 평등으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본토 시민들이 타지역에 미군 시설을 수용하기를 꺼린다는 이유로 그 부담을 오키나와인에게 계속 전가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 침해 발생 이전에 오키나와인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행위라는 사실이 가려진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바로잡으려면 기본적으로 평등권 침해에 항의할 수 있어야 한다.
구조적 차별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 고착되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책입안자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 먼저, 정책입안자들은 미 공군 기지를 후텐마에서 헤노코로 이전한다는 결정이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 14조 1항을 위반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현내 이전안은 25년 넘게 논의한 끝에 확정된 것이며 현재 이전을 위한 매립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 결정을 뒤집는 것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어렵기는 하겠지만, 이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강화되기만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정책입안자들은 차별을 해소하고 오키나와 내 군사 시설 집중으로 인한 부담을 완화할 법제를 도입하는 등의 반차별 조치도 시행해야 한다.
둘째, 일본국 헌법은 전쟁포기를 선언한 9조로 상징되는 평화헌법이다. 정책입안자들은 이 조항을 재검토해야 한다. 이 조항만으로는 차별과 억압, 소외, 빈곤 등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없는 평화를 달성하기 어렵다. 구조적 차별 없는 적극적 평화로 나아가려면 9조와 14조를 더해야 한다. 즉 차별적 대우 그 자체가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책입안자들은 일본 본토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 사회를 형성해 온 오키나와진흥개발특별조치법을 재검토해야 한다. 이 법은 오키나와 개발 계획을 위한 기본 정책의 결정권을 현이 아닌 일본 정부에 부여해 오키나와의 자율권과 자기결정권을 가부장적 통치governmental paternalism의 틀에 가두어놓는다. 실제로 이 법은 미일 안보 체제 유지의 기제로 작동하며 차별을 고착화했다.
마지막으로, 일본국 헌법 95조에 따르면 특정 지방자치단체의 자율권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려면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오키나와진흥개발특별조치법은 자치권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러한 절차 없이 시행되어 왔다. 이 법은 기한이 정해져 있어 10년마다 연장해야 한다. 이를 별달리 손대지 않고 연장하는 데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전문가가 늘고는 있지만 중앙 정부의 예산 삭감을 염려하는 현 지사가 폐지를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는 전문가나 지사가 아닌 오키나와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다. 현행법의 효력은 2032년 3월 31일에 만료된다. 미래를 내다보며, 오키나와 내에서 이 법의 연장이나 폐지, 아니면 더 높은 자율권 요구 등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공적 논의를 넓고 깊게 펼쳐나가야 한다. 현 지사 및 의회가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직접 주민투표를 요청해야 하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본토 반환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국가 안보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오키나와를 이용하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을 실질적으로 침해했다. 오키나와에서 나타난 군사 기지 집중 및 빈곤 문제의 이면에 깔린 보이지 않는 차별이라는 부정의를 해결하는 작업은 정치적 문화적 변화가 모두 필요한 엄청난 과제이다. 장기간 지속된 법을 개정하고 본토인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책입안자와 시민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 원문 기사 보기
NAGATSUGU ASATO
아사토 나가쓰구는 오키나와의 법무사로, 다중채무자 관련 사건을 담당한 후로 구조적 차별 해소를 위해 적극 활동해왔다.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출강하며, 이시가키시 주민투표 소송 법률팀에도 참여하고 있다. <왜 군사기지와 빈곤이 오키나와에 집중되는가?(なぜ基地と貧困は沖縄に集中するのか?))> (호리노우치 출판, 2022)의 공동 저자로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를 파헤친다.
NOBUO SHIGA
시가 노부오는 현립히로시마대학 보건복지학부 부교수이다. 히토쓰바시대학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빈곤 이론 및 사회정책 분야 전문가이다. <왜 군사기지와 빈곤이 오키나와에 집중되는가?> (호리노우치 출판, 2022)의 공동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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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신 일반 · 사회 · DE&I
[일본] 오키나와: 식민주의는 어떻게
사회경제적 격차를 발생시켰나?
글로벌 시리즈: 평등을 향한 도전
NAGATSUGU ASATO · NOBUO SHIGA
Summary. 식민주의로 인해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사이에 불균형한 권력관계가 고착되었다. 하지만 정책적 변화를 통해 이를 개선할 수 있다.
식민주의의 유산은 전 세계적으로 구조적인 차별을 심화시켜왔다. 또한 지배당하고 소외된 지역을 고립과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들게 했다. 일본에서 그 유산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지역은 한때 독립국이었다가 17세기 초에 최초로 점령당한 오키나와이다. 오키나와의 빈곤율은 35%로 전국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실업률, 비정규직 비율, 한부모 가정 비율도 전국에서 가장 높다. 한편 대학 진학률은 가장 낮다.
이 심각한 빈곤의 이면에는 면적이 국토 전체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현에 일본 내 미군 시설의 70% 이상이 몰려 있다는 중대한 사실이 있다. 이렇게 밀집된 군사시설이 지역 경제와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쳐왔는데도 불구하고 정부 각 기관에서는 안보상 필요하다거나 군사시설을 유치하는 대가로 국가가 경제적 지원을 얻는다며 이를 정당화해 왔다.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에서 빈곤이 발생하는 원인이 강력한 가족 간 유대와 지역적 뿌리로 인한 현지 특유의 순응 압력과 낮은 자존감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피상적이며 핵심적인 문제를 비켜난 것이다. 빈곤과 군사 시설이 오키나와에 집중된 것은 근대적 형태의 식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사이의 권력 역학 관계가 야기하는 구조적 불평등이 그 원인이다.
구조적 차별이란 특정 집단에 계속해서 가하는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인 차별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차별을 바로잡고자 할 때는 특별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차별은 사람들이 의식조차 못 하고 살아갈 정도로 일상생활 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온정적 편견benevolent prejudice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데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오키나와의 자연환경, 환대, 놀이 문화, 건강식 등을 칭송하면서 일본 본토와는 다른 오키나와 고유의 역사와 문화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오키나와 사람들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또한 의도치 않게 오키나와의 빈곤과 지역 주민들의 가치관, 행동양식을 연결 지을 수 있다.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인지하지 못하는 일본인이 많은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에 가해진 억압의 역사적 맥락과 그것이 지속되는 이유, 그리고 이 지역이 공정하게 대우받도록 하기 위해 정책입안자와 시민들이 담당할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억압의 역사
오키나와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역사적 사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오키나와는 한때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지만, 도쿠가와 시대인 1609년 일본의 강력한 봉건 영지 중 하나였던 사쓰마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해 정복함으로써 무역상의 이점을 확보하고 군사적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발판을 마련했다. 도쿠가와 막부 몰락 후 봉건제를 폐지한 메이지 정부는 1897년에 공식적으로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일본 정부가 두드러지게 오키나와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본토를 방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오키나와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제2차대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였다. 민간인 사상자가 10만 명에 달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해 일본 침공 작전의 기지로 삼고자 했다. 그해에 전쟁이 끝나자 일본 정부는 미국이 아시아에서의 군사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오키나와를 점령하도록 허용하는 대가로 전쟁포기 조항9조이 담긴 새 헌법을 제정했다.
중요한 사실은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철도가 초토화되었고 전후 도로 건설은 주로 미군의 이익을 위해 시행되었으며, 오키나와 주요 산업원이던 농지의 상당 부분에 군사 시설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게다가 오키나와는 미군정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 본토와 같은 수준의 전후 재건 자금을 투자받지 못해 사회적 산업적 기반 개발이 크게 뒤처졌다.
1971년 오키나와와 그 외 일본 영토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 해결을 목표로 한 오키나와진흥개발특별조치법沖縄振興開発特別措置法이 통과되었지만, 이 법에 따라 집행된 공공사업 예산 중 절반 정도는 대형 건설사를 통해 다시 본토로 흘러 들어갔다.
좌절당한 변화의 목소리
미국은 오키나와를 계속 지배했고 베트남전이 발발하자 오키나와를 보급 기지와 출격 기지로 활용했다. 이 시기 오키나와에서는 반식민 평화운동이 급성장해 일본 본토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 모두 이러한 운동을 억눌러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미국은 1972년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했지만 재정적 부담도 지지 않고 점거 행위에 대해 국제적으로 비판받는 일도 없이 기지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반환을 공식화함으로써 국가주의 정서를 조성했고, 오키나와를 미일 안보 체제 유지에 핵심적인 지역으로 남겨 두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후로 지금까지도 일본 사법 당국은 미일 주둔군지위협정으로 인해 미군 성폭행을 비롯한 각종 폭력 행위 사건을 직접 조사하지 못하고 있다. 이 협정을 전면 개정하라는 요구가 전국적으로 이어져 왔는데도 반세기가 넘도록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지 이전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역대 일본 방위성 장관들은 군사 시설을 현 외부로 이전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인정했지만, 현실적으로 본토의 동의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2009년 선거에서 후텐마에 있는 미 공군 기지를 오키나와 외부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나 이듬해에 스스로 철회했다. 그래도 2019년 2월 후텐마를 대신해 역시 오키나와 현내 지역인 헤노코에 새 기지를 건설하는 안을 놓고 현내 모든 유권자를 대상으로 구속력 없이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70% 이상이 반대표를 던졌고 이후로도 시민들은 계속해서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다. (이 글의 공동 저자인 아사토 나가쓰구는 오키나와의 일을 주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헤노코 주민투표위원회 부대표로 활동했다.)
형평성과 자기결정권을 향해
하버드 법학대학원 교수 J. 마크 램지어J. Mark Ramseyer는 ‘하층민의 감시 이론’이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했거나 강제로 이주당한 조선인의 후손이 대부분인) 재일조선인, (역사적으로 배척당해 온) 부라쿠민部落民, 오키나와 주민 등 일본 내 소수집단들은 대체로 정부 보조금을 얻으려고 인권 침해 구제와 대책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오키나와의 빈곤, 그리고 낮은 학업 수준과 높은 이혼율 및 혼외 출생아 수 등 유독 오키나와에서 두드러지는 문화적 현상이 오키나와 고유의 문화적 특성이나 특유의 문화적 유산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오키나와 현지 언론에서는 이 논문이 인종차별, 특히 고유한 역사에서 비롯한 문화, 언어, 종교, 전통, 관습의 차이에 따른 차별인 문화적 인종차별의 중대한 사례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차별적 시선은 오키나와의 극심한 빈곤의 이면에 깔린 구조적 차별과 착취의 역할을 간과한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현지의 필요를 희생시켜 본토의 복지, 안전,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정치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조건뿐 아니라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데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단마저 박탈하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 헌법 14조 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인종, 신조信條, 성별, 사회적 신분 또는 가문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또는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차별받지 아니한다.” 면밀히 살펴보면 이 조항에는 역사적으로 특정 속성에 기반한 차별로 낮은 지위에 놓인 집단이 있다면 이를 해결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동안 일본의 헌법학자와 법조인은 이 조항을 광범위한 평등권이 아닌 특정 개인의 권리 측면에서의 평등으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본토 시민들이 타지역에 미군 시설을 수용하기를 꺼린다는 이유로 그 부담을 오키나와인에게 계속 전가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 침해 발생 이전에 오키나와인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행위라는 사실이 가려진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바로잡으려면 기본적으로 평등권 침해에 항의할 수 있어야 한다.
구조적 차별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 고착되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책입안자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 먼저, 정책입안자들은 미 공군 기지를 후텐마에서 헤노코로 이전한다는 결정이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 14조 1항을 위반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현내 이전안은 25년 넘게 논의한 끝에 확정된 것이며 현재 이전을 위한 매립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 결정을 뒤집는 것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어렵기는 하겠지만, 이대로 받아들인다면 오키나와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강화되기만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정책입안자들은 차별을 해소하고 오키나와 내 군사 시설 집중으로 인한 부담을 완화할 법제를 도입하는 등의 반차별 조치도 시행해야 한다.
둘째, 일본국 헌법은 전쟁포기를 선언한 9조로 상징되는 평화헌법이다. 정책입안자들은 이 조항을 재검토해야 한다. 이 조항만으로는 차별과 억압, 소외, 빈곤 등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없는 평화를 달성하기 어렵다. 구조적 차별 없는 적극적 평화로 나아가려면 9조와 14조를 더해야 한다. 즉 차별적 대우 그 자체가 위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책입안자들은 일본 본토로 반환된 후 오키나와 사회를 형성해 온 오키나와진흥개발특별조치법을 재검토해야 한다. 이 법은 오키나와 개발 계획을 위한 기본 정책의 결정권을 현이 아닌 일본 정부에 부여해 오키나와의 자율권과 자기결정권을 가부장적 통치governmental paternalism의 틀에 가두어놓는다. 실제로 이 법은 미일 안보 체제 유지의 기제로 작동하며 차별을 고착화했다.
마지막으로, 일본국 헌법 95조에 따르면 특정 지방자치단체의 자율권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려면 주민투표를 통해 주민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하지만 오키나와진흥개발특별조치법은 자치권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러한 절차 없이 시행되어 왔다. 이 법은 기한이 정해져 있어 10년마다 연장해야 한다. 이를 별달리 손대지 않고 연장하는 데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전문가가 늘고는 있지만 중앙 정부의 예산 삭감을 염려하는 현 지사가 폐지를 요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는 전문가나 지사가 아닌 오키나와 주민들이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다. 현행법의 효력은 2032년 3월 31일에 만료된다. 미래를 내다보며, 오키나와 내에서 이 법의 연장이나 폐지, 아니면 더 높은 자율권 요구 등 다양한 선택지에 대한 공적 논의를 넓고 깊게 펼쳐나가야 한다. 현 지사 및 의회가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키나와 주민들이 직접 주민투표를 요청해야 하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본토 반환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국가 안보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오키나와를 이용하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의 자기결정권을 실질적으로 침해했다. 오키나와에서 나타난 군사 기지 집중 및 빈곤 문제의 이면에 깔린 보이지 않는 차별이라는 부정의를 해결하는 작업은 정치적 문화적 변화가 모두 필요한 엄청난 과제이다. 장기간 지속된 법을 개정하고 본토인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책입안자와 시민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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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GATSUGU ASATO
아사토 나가쓰구는 오키나와의 법무사로, 다중채무자 관련 사건을 담당한 후로 구조적 차별 해소를 위해 적극 활동해왔다.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출강하며, 이시가키시 주민투표 소송 법률팀에도 참여하고 있다. <왜 군사기지와 빈곤이 오키나와에 집중되는가?(なぜ基地と貧困は沖縄に集中するのか?))> (호리노우치 출판, 2022)의 공동 저자로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를 파헤친다.
NOBUO SHIGA
시가 노부오는 현립히로시마대학 보건복지학부 부교수이다. 히토쓰바시대학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빈곤 이론 및 사회정책 분야 전문가이다. <왜 군사기지와 빈곤이 오키나와에 집중되는가?> (호리노우치 출판, 2022)의 공동 저자이다.